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저민 해리슨 (문단 편집) === 대통령 취임 후 === 해리슨은 공약대로 [[1890년]]에 퇴역 군인에 대한 연금법안을 제정한다. 이 법은 퇴역한 상이군인과 그 부양가족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당시 [[윌리엄 매킨리]]가 주장한 '매킨리 관세법'을 제정하는데 이것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높이 올리는 법안이다. 또한 미국 국고에 매달 450만 온스의 은을 매입하는 법을 제정히는데 이 법들은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자 덩달아 다른 상품의 가격이 뛰는 바람에 물가가 올라 버려 불황을 초래한 데다가 은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을 금과 은으로 충당하는 바람에 은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은을 다시 금으로 상환받아서 국고에 금이 고갈되고 결국 다시 불황이 오고 만다. 또한 당시 미국에 만연하던 대기업의 독점 체제인 '트러스트'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1890년]]에 '셔먼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킨다. 이 법 자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정책이었으나 해리슨의 추진력은 정책을 추친하기에 너무 부족하였고 기업과 정치인들의 유착은 여전해서 기업들의 합병과 담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법이 제대로 작용한 것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집권할 무렵이다. 외교와 국방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우호적 무역 협정을 추진하였으며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군을 현대적으로 무장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해리슨은 중앙아메리카 어딘가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운하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해리슨의 주장은 10여년 뒤에 [[파나마 운하]]가 착공되면서 이루어진다. 해리슨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세부적인 면도 매우 꼼꼼히 챙겼고,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이 못 미더워서 대통령이 된 후 16개월 동안 거의 매일 1,700명에 달하는 정부 관료들의 후보자들을 직접 면접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독자적인 해리슨의 정책은 의회와 공화당과 마찰을 겪어 결국 지지를 잃었고 법안 제정하면서도 정작 법의 시행에는 상당히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해서 나라의 발전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해리슨의 정책은 적절할 수도 있지만 정말 인사가 만사였다면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재임 도중 경제 공황이 지속되자 [[1890년]] 민주당에게 전체 하원 의석의 2/3를 내주는 굴욕을 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